본문 한중일 삼국의 개항과 근대화에 대해서 Ⅰ. 서 론 한중일 삼국을 둘러싼 역사 분쟁은 그 원인을 개항기 이후 근대화 시기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아시아의 질서에서 지난 18세기부터 시작된 새로운 흐름이 가져다 준 역사적 변화는 현재까지 3국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을 당한 일제 강점기가 우리사회에 미친 해악과는 별개로 우리가 식민지를 경험하게 되었던 원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동북아 삼국의 근대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근대화는 기존의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연결되어왔던 동북아의 질서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전통적 질서를 파괴시킨 시대적 변화가 일어난 사건이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포함해서, 서양세력의 침략, 내부적으로 쇄국과 개방 사이에서 3국이 선택한 변화양상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3국의 선택으로 인한 동북아 질서의 변화와 사회 발전 양상 등을 통해서 현재의 국제 질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통로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현재 근대화를 이룬 한중일의 과정을 1840년대를 전후한 시기부터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그로 인한 3국의 변화된 모습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본 론 1. 18세기 무렵 한 중 일 3국의 정세 먼저, 19세기 중반 무렵 조선과 청나라, 일본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조선의 경우에는 이미 19세기에 진입하면서 조선사회의 기반이었던 양반관료체제를 포함한 전반적인 사회구조의 해체기를 맞이했다. 영정조의 탕평정책 이후로 조정에서는 세도가문의 권력이 정점에 달해서,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이에 대한 개혁 요구가 평민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였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등이 외척 가문으로 성장하면서 국정의 전반을 좌우하는 세도정치의 시대로써, 조선을 지탱하던 과거제도의 부정이 심화되고, 매관매직이 일반화되어서 인사에 대한 불만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일부 대지주를 제외한 소작농들은 유민이 되거나 화정민이 되는 등 농업사회의 근간인 농민의 노동력이 붕괴되기 시작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들이 도처에서 민중항쟁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청나라에 대한 조공질서를 바탕으로 외교정책을 펼쳐오던 상황이었고, 서양인과의 최초의 접촉이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척화사상과 개화세력의 갈등이 점차적으로 점진되기 시작하였다. 외부적인 위협을 감지하지 못하고, 내부적 사회 발전 동력을 상실한 채 모순된 상황에서 원치 않은 개방의 흐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중화사상의 중심으로 외부 세력을 야만족으로 인식하는 구태적인 사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건륭제 이후로 청나라는 광동지역만을 서양과의 무역통로로 인정하는 광동무역체제를 고수해 왔는데, 이는 다른 국가와의 상호 동등한 통상관계에 대한 의식이 부재하고, 조공관계를 통해서 전통적 중화사상을 유지하는 국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외국 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도 부재한 상황에서 아편전쟁의 결과는 중국의 역사를 바꾸는 시발점이 된다. 당시 서구 사회에서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서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은 자제해 왔지만, 아편전쟁 이후로 중국에 대한 열강세력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펼쳐지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등장한 도쿠가와 막부 체제에서 약 2세기에 걸친 평화 체제가 유지되어 왔지만, 19세기 들어서 공고하던 신분제가 동요하기 시작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싹트기 시작했다. 해상무역이 발달한 일본 내부에서 상업 자본세력이 성장하면서 부를 바탕으로 그들의 영향력을 향상시키고자 시도가 이어졌지만, 무사 계급으로 한정된 정치 체제에서 번번이 좌절되고 있었다. 무사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필요에 의해서 상인 계급과 결탁해서 그들에게 많은 부채를 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채권자인 상인들은 자신의 경제적 권력을 이용해서 사회에서 발언권을 획득하고자 노력했다. 일부 상인들은 하급 무사 가문과의 혼인을 바탕으로 신분 변동을 획책하는 등 계급 사회의 혼란이 발생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농민집단은 조세 부담과 각종 부역에 대한 반발로 농업을 포기하거나 상업 자본의 요구에 의해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등 자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자 했고, 권력에서 소외된 하급 무사들도 나름의 불만을 가지고 생활하던 시기이다. 서양세력과의 통상이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먼저 발생했지만, 중국의 존재로 인해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일본 사회에 서양 세력이 등장한 것도 18세기 중반 무렵이었다. 당시 에도 막부는 쇄국 정책을 사용해서 개항요구를 거절하지만, 이 또한 무력을 앞세운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을 만한 군사적 대비는 미비한 상황이었다. 2. 한 중 일의 개항 과정 한중일 삼국의 개항과정은 중국의 사례를 바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로 영국과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1842)을 체결하게 되었다. 1843년의 부속조약을 포함해서 해당 조약의 내용은 상하이와 광저우를 포함한 5개의 항구를 즉각 개항하는 요구를 받아들이고, 조차지로 홍콩의 영유권을 영국에게 할양하게 되었다. 개항장에서는 조계를 설치하고, 무역 상 최혜국 대우를 설정하고, 관세 자주권마저 상실하는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당시 근대적 조약의 파급력을 제대로 이해하는 관료들은 많지 않았다. 이후 추가적으로 미국과 왕샤조약(1844), 프랑스와 황푸조약, 스웨덴, 노르웨이와 광둥조약(1847), 러시아와 이리조약(1851)을 체결하는 등 연이어 서양 세력과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 중에서 프랑스는 중국 대륙의 기독교 포교권을 인정받게 되고, 러시아는 내륙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추후 영토분쟁을 경험하게 된다. 아편전쟁의 결과는 동북아 3국의 질서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데 중화사상의 몰락의 시발점이 되면서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조선의 각종 개혁 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제 1차 아편전쟁의 패배 이후 5개 항구를 개항했으나, 영국 세력을 내륙 진출을 원했고, 1856년 광저우에서 발생한 애로우호 사건을 빌미로 제 2차 아편전쟁을 펼치게 된다. 영국은 프랑스와 연합해서 공동으로 출병하고, 광저우를 점령하고 텐진까지 북상한 후 기존의 통상조약을 개정을 요구하고, 이에 미국과 러시아 세력까지 합세하면서 청나라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858년에 맺어진 텐진조약은 베이징에 외교사절을 상주시키고, 내지 여행과 양쯔강 통상을 허용하게 하며, 관세율 협정이 진행되는 결과를 나타내게 되었다. 하고 싶은 말 좀 더 업그레이드하여 자료를 보완하여, 과제물을 꼼꼼하게 정성을 들어 작성했습니다. 위 자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학업에 나날이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구입자 분의 앞날에 항상 무궁한 발전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홧팅 키워드 조약, 세력, 사회, 아편전쟁, 세기, 중국 |
2019년 1월 11일 금요일
(레포트) 동아시아의 역사문화 한중일 근대화에 관한 레프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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