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31일 일요일

제2장 (기원전 500년까지의 초기로마)

제2장 (기원전 500년까지의 초기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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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로마문명사≫ 제 2장. 기원전 500년까지의 초기 로마
도시 로마의 창건은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라틴인이 정착한 것, 또는 퀴리날리스 언덕에서 사비니인들이 정착한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도시 로마는 정치적 종교적 행위로 정확하고 엄숙한 의식에 따라 한 지도자 즉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 로시 로마의 경계선인 포메리움은 황소와 암소의 쟁기질에 의해 정해졌으며 가장 높은 언덕 부분은 로마인들을 수호하는 신들의 거처로 정해지기도 했다. 이때 남북을 닛는 카르도와 동서를 잇는 테쿠마누스, 중요한 두 거리가 생성되기도 하였다.
도시 로마의 창건식은 에트루리아인 왕이 주관하여 개최되었으며 신들에 의한 점에 의해서 로마의 운명은 정해졌다고 본다. 라틴적, 사비니적, 에트루리아적 요소의 연합이 도시 로마의 주 구성원이었으며, 카피톨리누스 언덕에는 요새와 제사를 위한 성소가 위치했다. 또한 이 세 언덕에는 습한 계곡이 있는데 이를 배수처리하여 경제, 정치생활의 장소로 이용하였다.
도시 로마는 창건이후 지리적 이점 때문에 번성하였다. 카피톨리누스 언덕 바로 아래 티베르 강에 있던 티베르 섬이 강을 건너기 좋은 지점이었다. 티베르 강을 건너는 길은 이탈리아의 가장 번영했던 두 지역인 에트루리아와 캄파니아를 연결한다는 점에서 중요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길은 티베르 계곡으로 연결되었고 테베르 강 하구 근처 오스티아는 소금산지가 있어 기원전 6세기 말경이 되면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영하였다.
도시 로마는 농업을 토대로 생활하였다. 하지만 이 땅은 경작하기 쉽지 않았으며 배수시설을 확충하여 비로소 경작이 가능하게 되었다. 고고학에서는 캄파니아 지역에 엄청난 규모의 운하체계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곡물 경작이 초기 농업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로마시의 채소시장에 내다 팔기위해서 채소가 재배되기도 했으며 무화가가 과일 중에서 가장 먼저 제배되고, 그리스 농업의 영향으로 포도와 올리브도 추가되었다. 숲 지대에서는 돼지가 사육되었으며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은 도시 로마의 국력이기도 했다.
가족의 단위는 파밀리아로, 그 구성원은 남편, 아내, 그들의 미혼 자녀들, 함께 거주하는 노예이다. 어던 점에서는 죽은 자들도 함께 살기도 했다. 파밀리아에서의 권위의 원천은 가부장이었고, 모든 재산에 대한 권한과 그 가솔들에 대한 생사 여탈권까지 허용되는 법적 권한이 주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이 가부장권은 가정의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기 위하여 소집된 가족회의에 의해서 조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도시 로마의 중요 사회단위로 씨족이 있는데, 이 씨족은 혈연적으로 가까운 가족들이 모여서 구성되었다. 특히 귀족 가문들의 씨족은 자긍심이 강하여 자기 씨족을 신이기도 했던 신조에게까지 연결시켜 설명하였다. 그 예로 율리우스 씨족이 베누스 여신과 연결되는 모습, 웨일스 가문은 프리암 그 이상가지 시조로 연결시키는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씨족은 로마 정치에서 공적 역할은 하지 않았지만, 아주 중요한 형태였다. 그들에 의한 국제 통제는 소수의 대가문들이 로마를 통제하였다고 할 수 있다.
로마의 여자들은 그 지위가 하나의 파라독스였다. 고대 로마의 전통적인 결혼 형식은 그녀의 남편의 '권한 밑으로'옮겨졌으나 실제로 동등한 파트너로 간주되었으며 가정부인으로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기도 하였다. 게다가 또 다른 결혼 형식이 일반화 디는데 이때에 여성이 남편의 '권한 밑으로'라는 관념이 적용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결혼형식은 에트루리아의 영향 또는 모계사회의 잔존으로 본다.
로마인들의 종교는 그들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며, 그 관념의 원시성과 그 의식의 제도화라는 중요한 두 특징이 있다. 원시인은 세계에 보이지 않는 힘들에 지배되고, 이 힘들을 로마인들은 누미나 즉, 신이라 불렀다. 또한 로마인들은 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었다. 이 신들의 숫자는 무한했으며 그 활동이 자신들에게 영향을 직접 줄 경우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러한 종교행위의 목적은 신을 불러내어 일종의 거래를 하는 것으로, 당신이 내게 해주는 대로 내가 당신에게 한다는 것이다. 자기자신이 사제가 되는 형태를 보인다. 그리고 이들 신에게는 희생제사를 드렸으며 서원식이라는 하나의 계약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수많은 의인화된 신들에 대한 숭배를 드렸으며 이들중 어떤 신들은 국가차원에서도 숭배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제사는 베스타 숭배였으며, 이런 국가종료행사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설조직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사제단이 구성되었으며 이들 책임자로 대사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또 다른 사제단으로는 복점관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신들의뜻을 해석하는 점쟁이 형태였다.
분명한 것은 아주 개괄적인 연대를 제외하고는 근대의 역사 비평은 초기 로마의 정치사나 이야기식 역사라 부를만한 어떠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며, 기원전 8세기 중엽쯤 왕정이 존재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왕들은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문화가 결합한 로마인의 인종적 구성과 일치하게 구성되었다. 기원전 6세기 말 에트루리아 계 왕이 과두 혁명에 의해 축출당했다는 사실은 로마시의 상업적 이해 관계자들에 대한 토착 토지귀족들의 항거였으며 공화정 초기의 신분투쟁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고 싶은 말
좀 더 업그레이드하여 자료를 보완하여,
과제물을 꼼꼼하게 정성을 들어 작성했습니다.

위 자료 요약정리 잘되어 있으니 잘 참고하시어
학업에 나날이 발전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
구입자 분의 앞날에 항상 무궁한 발전과 행복과 행운이 깃들기를 홧팅

키워드
초기로마, 로마, 초기, 기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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